🌿
저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하는 리추얼이 있는데요,
바로 일년 동안 쓴 일기를 읽어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리추얼을 하지 않고 넘어갔어요.
올해 2월, 도쿄의 오래된 문구점 카키모리에서 커스텀으로 공책을 제작하여 구매했어요.
가족들이 저와 정말 어울린다고 이야기해 주었을 정도로 저의 취향이 잘 담긴, 마음에 드는 공책이었어요.
특히 올 8월 발리에서 CBC (Contact Beyond Contact; 무용, 치유, 영성적 방법론을 이용한 춤 치유 메소드; 인스타 @contactbeyondcontact) 수업을 들었을 때 토의했던 개념들, 모든 디테일한 움직임 활동들, 사람들에게 받은 피드백, 인상 깊은 대화, 느낀 점들을 카페에서, 길에서, 비행기에서 틈이 날 때마다 빼곡히 적어 두었어요.
아주 깊고 큰 변화의 여정 중의 생생한 경험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공책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서울에서 공책이 들어있던 가방을 잃어버려서 공책도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가방에는 제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많이 들어 있었어서, 상실의 아쉬움이 크게 다가왔어요.
저는 왜 그때 소중한 것들을 모아 둔 가방을 잃어버렸을까요?
소중한 것도 잃을 수 있다는 배움이 필요했던 걸까요?
뇌과학자들은 '경험하는 나'와 경험을 '서사로 정리하는 나'가 다르다고 말해요.
(편의상 '살아가는 나', 그리고 '역사가 나'로 표현해 볼게요.)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나 외에도 과거를 회상하며 기록하는 역사가 나가 필요해요.
마치 기록된 것만이 역사로 기억되고 후대에 의해 해석되듯, 나에 대한 기록이 없다면 내 삶의 의미를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살아가는 동시에 나의 서사를 쓰는 것은 꽤 어려운 작업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모드를 전환해가며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지나온 길을 되짚으며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지도를 그리기도 해요.
어쩌면 기억하는 작업의 무게감 때문에 제가 닮고 싶은 소박하고 따뜻한 공책을 만들어 저 대신 인생을 기억해달라고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겠어요. 잠시 나를 망각하고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요.
그러나 어떤 것이든, 그 책임을 다른 존재에게 떠넘기고 성취한 현존이라면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현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의존은 기대와 집착을 만들고, 망각된 나는 돌아오지 않아요. 어느 순간 기록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었고요.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기억해야 해요. 온 감각으로 새기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 온 감각으로 삶의 구석 구석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기록을 상실함으로써 깨달아요.
어쩌면 기억하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삶을 사는 존재 (Living Being)'가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
서로를 인식하며, 기억하는 삶을 위한 기록을 만들어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