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와까 (Oxaca) 의 한 성당 |
🌵 안녕, ! 안온한 날들 보내고 있나요?
저는 지금 멕시코 서쪽 오와까 지역에 있어요. 멕시코시티보다 더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라서 지금까지는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멕시코시티에서는 쌀쌀해서 가져온 여름 옷들을 하나도 입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실로 짠 민소매도 입고 은과 옥으로 된 반지도 끼고, 조금 더 제 영혼과 연결된 차림으로 다니고 있어요. 어제는 일어나자마자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요가도 하고 춤도 췄고요! 오늘 아침엔 구름 하나 없는 쾌청한 하늘이 기분이 좋아 언덕을 마구 달렸어요. 이곳에 얼마나 있게 될 지, 이제 어느 곳을 가게 될 지,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지금이 참 자유롭네요!
-- 오늘은 멕시코시티에서 인상 깊었던 경험을 하나 더 공유하려고 해요🙂
멕시코시티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저는 고대 유적 테오티우아칸에 갈 생각에 잔뜩 부풀었어요.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거든요!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은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800년까지 존속했던 아메리카 최초의 도시 문명으로, 면적이 200만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시 최대 규모의 도시였어요. 아주 거대한 문명의 터전인 테오티우아칸은 몇 개의 건물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관광객들은 주로 중앙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제의를 지내던 구조물들, 일부 건물과 터를 방문하곤 해요.
메소아메리카 전설에 따르면 제4 태양계가 끝나고 태양과 달이 사라져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다고 해요. 테오티우아칸에만 유일하게 약간의 빛이 남아 있어서, 신들은 이곳에 모여 어둠에 싸인 세상을 걱정했어요. 신들은 고민 끝에 두 명의 신을 선발하여 빛을 소생시키기로 했고, 나나우아씬과 떼꾸씨아까뜰이 그 역할을 자처했어요. 그들은 불 속에 뛰어들어 자기 몸을 태웠고, 각각 태양과 달로 다시 태어났어요. 그렇게 세상은 빛을 되찾고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것이 제5 태양계의 시초라고 해요. 아즈텍, 마야, 잉카 모두 제5 태양계를 믿었으니, 테오티우아칸은 이들 문명의 중심이자 최고의 성소라고 할 수 있지요!
테오티우아칸은 약 1000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다가 북아메리카에서 내려온 호전적인 유목민 똘떼까에 의해 멸망했어요. 이후 권력을 잡은 아즈텍도 비슷하게 북아메리카에서 남하한 유목민족이었고요. 똘떼까와 아즈텍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으로 알려져 있어요. 아즈텍은 일 년에 2만 명을 인신 공양으로 바쳤어요. (심지어 1487년 태양의 피라미드 보수공사 이후의 재봉헌식에서는 나흘 동안 8만 200명을 제물로 바쳤다고 해요)
인신 공양은 매일 이루어졌어요. 흑요석으로 만든 칼로 산 사람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고, 아직 펄떡이는 심장을 '착몰'이라는 돌 선반에 올려 태양신께 헌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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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테오티우아칸은 듬성듬성 선인장이 살고 있는 평원에 있었어요. 평원 뒤쪽에 어머니(Mother)라고 불리는 커다란 산이 있었고요. 장시간 앉아 있느라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과 웨이브로 풀어 주고,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선글라스를 꼈어요. 선인장들을 구경하며 해가 번쩍이는 벌판을 걸어 유적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정면에 아주 거대한 태양의 피라미드가 보였어요. |
 | 태양의 피라미드 |
태양의 피라미드의 첫인상은 '크다, 웅장하다' 였어요. 고개를 들어 바라본 피라미드 능선에 해가 비치면서 '반짝'하던 섬광이 기억에 남아요. 당차고 거대하고 빛나는 태양신 같았어요.
태양의 피라미드 앞에 가로로 이어져 있는 '죽은 자의 길'을 따라 좌측에 위치한 달의 피라미드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달의 피라미드는 현재 올라갈 수 없지만 바로 앞에 있는 제단같이 생긴 터 위에는 올라갈 수 있어요. 숨을 한 번 길게 내쉬고, 발을 딛고 있는 흙의 감촉, 피부를 스치는 바람의 감촉을 느끼면서 천천히 그곳에 올랐어요. |
 | 달의 피라미드 |
달의 피라미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굉장히 신성한 느낌이 들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임에도 피비린내가 나거나 스산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그저 거대하고 투명한 자연, 너그러운 어머니가 느껴졌어요. 마음이 잔잔히 떨리며 몸에 따뜻한 숨이 퍼져 나가고, 곧 눈물이 흘렀어요. 앞에 있는 돌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어요. 햇볕이 데워준 따뜻함, 그리고 잔잔한 대지의 진동이 몸에 전해졌어요.
'정말 신성한 곳이구나'.
아즈텍은 테오티우아칸의 이 무한한 신성이 두려웠던 걸까요? 그저 받아들이면 될 것을, 그들 자신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닐까요?
-- 유적지 내에는 군데군데 조그만 노상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칼, 거울, 조각상, 그리고 귀신이 우는 것 같은 무서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팔고 있었어요. 아즈텍은 죽은 자의 영혼을 어찌하지 못해 여러 무구를 고안했지만,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악기의 소름 끼치는 소리는 바람 속에 하릴없이 흩어지고, 흑요석 칼은 미니어처 기념품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고 있네요.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수천 년 동안 이 자리에서 인간이 존재의 두려움과 분투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거예요. 신은 산처럼, 어머니처럼 판단하지 않고 존재해요. 신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포용력이 크면 클수록, 그 앞에 선 인간은 내면의 두려움과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을 직시하게 되죠.
하지만 불안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해소할 수 없어요. 솔직한 내면을 마주하는 것만이 존재와 신성을 연결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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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티우아칸의 달의 피라미드는 하늘과 땅의 에너지가 만나는 곳에 세워졌다고 해요. 지하에는 물웅덩이가 있고, 지구라트형 피라미드의 꼭대기 중앙에는 말뚝이 박혀 있었대요. 말뚝은 땅과 하늘의 정기가 만나는 곳을 의미했어요.
어쩌면 그곳에서 제가 아주 깊은 연결감을 느낀 이유는 하늘과 땅 사이 어딘가에서 정기를 한 몸에 받아서였을 수도 있겠어요. 저는 그냥 이렇게 있어 주는 이곳이 참 고마워요. 테오티우아칸의 당당하고 너그러운 존재가, 이 지역을 점령헸던 수많은 세력의 침범에도 이곳을 티끌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 같아요.
-- 달의 피라미드를 돌아 우측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남은 유적지를 걷다가 잠시 터에 앉았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득하고 평화로워요.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려, '어째서 이곳은 이렇게 편안할까?' 말했더니, 친구가 빙그레 웃네요.
2025.1.24. 비유 |
🕊️ *테오티우아칸에 가기 전에 지난 번 소개했던 채경석님의 "중미, 라틴을 꽃피운 땅"을 읽었어요. 레터에 적은 테오티우아칸에 대한 정보들은 이 책과 테오티우아칸 유적 내 설명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유적에서의 감상은 제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작성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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